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불상 높이 108cm, 방형 대좌 93.5×91.1×24.5cm. 9세기 [[통일신라]]시대에 조성된 [[화강암]]제 불상으로,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[[일제강점기]] 때 [[일본인]]이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서 처음 발견했다. 세상이 알려짐은 1917년 간행된 『조선고적도보』 5권에 사진이 실린 것이 최초이다. 이후 1927년에 [[조선총독부]]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특별한 [[한국]]의 국보를 관저에 함께 세워놓자는 의견에 따라 이 불상을 낙점하여 총독관저로 옮겼다. 이 불상이 처음 발견된 경주 남산의 폐사지는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른다. 다만 일부 학계에서는 [[삼국유사]]에 기록이 있는 유덕사(有德寺)란 절로 추정한다. 유덕사는 고[[신라]]시대의 태부각간 최유덕이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[[경주시|경주]] 남산에 세운 절이라는 기록이 [[삼국유사]] 권 제3 유덕사조(有德寺條)에 있다. 이 설은 따르는 사람들은 이 불상 또한 '유덕사(有德寺) 석가여래좌상'이라 부르지만 공식적으론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가지 설에 불과하다. 한편 이 절이 유덕사가 아니라 이거사(移車寺)라는 절이었다는 주장도 나왔다.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oid=001&aid=0010402703&sid1=001|연합뉴스 기사]] 현전하는 석불좌상의 전체적인 외형은 세월이 흐르며 약간 풍화된 것을 제외하면 큰 손상이 없이 거의 온전한데, 고대 석불 가운데 파손 없이 이렇게 완전한 사례는 상당히 드물다. 특히 [[신라]] 불교조각의 정수인 경주 [[석굴암]] 본존불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.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와 풍부한 양감이 돋보이는 표현, 섬세한 부채꼴 옷주름 등에서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한 통일신라 불상조각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. [[파일: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4.jpg]] 조선 총독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가 불상에 예를 표하는 모습. 일본도 [[불교]]를 신봉하는 나라이므로 천 년이 넘은 불상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. [[파일: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3.jpg]] [[파일: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5.jpg]] [[문재인]] 대통령이 여야 원내대표들과 함께 불상에 예를 표하는 모습.[[http://news.bbsi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989188|사진 출처 : 연합뉴스 - 2020년 5월 文 대통령-여야 원내대표 '靑 미남불' 앞 합장..."협치 다짐"]]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 년 전 경주에서 만들어진 [[신라]]시대 석조여래좌상으로, [[일제강점기]] 때 총독관저로 이동된 이후 지금까지 쭉 10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켰다. 1974년 1월 15일 [[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|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]] 제24호 석조여래좌상(石造如來坐像)으로 지정되었다가, 2009년 6월 4일 문화재 지정명칭이 석불좌상(石佛坐像)으로 변경되었고, 최종적으로 2018년 4월 20일 보물 제197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